변상기 | (株)國東 會長

“한국 봉제역사의 한 축에 ‘國東’이 있었습니다”

창립 50주년을 한해 앞둔 글로벌 섬유•봉제기업 ㈱國東의 수장, 변상기 회장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本誌 통권 500호 기념, 특별 초대 인물로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듬직한 체격, 훈훈한 외모에 잔잔한 미소가 퍽이나 다감해 보였다. “월간 봉제기술 통권 500호, 햇수로 41년 하고도 8개월인데 대단한 기록입니다. 우리 섬유•봉제업계의 생산활동이나 기술개발을 하는데 큰 도움과 함께 지대한 영향을 주어 섬유•봉제업계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감사와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수인사를 나누고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본지 통권 500호 축하 인사부터 깨알같이 챙긴다. 기자 역시, 창립 50주년을 코 앞에 둔 ㈱國東의 승승장구를 소원하면서 “긴 세월, 수많은 섬유•봉제기업들이 명멸하는 가운데서도 꿋꿋이 외길을 걸어 지금에 이른 ㈱國東이야말로 섬유봉제강국,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표상”이라고 화답했다. <편집자주>

= ‘國東’의 의류수출을 주도하며 막강 섬유·의류기업으로 성장해 5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초기 국동을 회상한다면?
1967년에 선대 회장께서 회사를 세웠다. 이보다 앞서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이 군 제대 후 우연한 기회로 월남 산업시찰단에 동행하게 됐다. 거기서 채명신 장군 그리고 김정렴(후일,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씨를 만났는데 김정렴씨가 “옷을 좀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마침 군납을 하고 있으니 군복 수선업부터 시작하겠다”고 한 게 섬유업에 첫 발을 들인 계기가 됐다.
67년 당시 당시 무역회사를 설립하기엔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미국은 전부 섬유쿼터였고 유럽은 쿼터가 막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런 이유로 바이어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 시작은 ‘파자마’였다. 프랑스시장을 중심으로 폴로셔츠와 파자마로 특화했다.
쿼터 4항이 폴로셔츠, 티셔츠였는데 당시 프랑스시장에 대우실업이 130만 장, 삼성물산이 120만 장, 우리(국동)가 100만 장, 이렇게 3개 기업이 총괄했다. 그 쿼터를 기반으로 무역업무가 시작됐다. 그리고 파자마는 프랑스시장에 90%가 국동 쿼터였고 10%가 정부의 오픈 쿼터였다.
즉, 파자마를 프랑스에 수출하려면 우리 회사를 통하지 않고는 수출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었다. 그때 아크릭 파자마 협력공장이 여러 곳 있었다. 협력공장들도 재미를 톡톡이 봤다. 우리 역시 협력공장 덕분에 호시절을 풍미했다. 회사의 재정상태나 영업환경도 좋아 1978년 전후해 직원들에겐 보너스를 1,200%씩 지급하기도 했다. 영업맨들에겐 승용차가 귀할 때였지만 영업을 위해 포니, 브리사, 피아트를 제공했다.
확보한 쿼터는 100% 우리가 생산했다. 그땐 바이어들이 쿼터 있는 집을 찾아서 오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됐다. 그만큼 영업이 쉬웠다.
당시 거래하던 바이어들은 “국동은 담당자가 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영업하기 편하고 한번 오더를 던져 놓으면 납기까지 문제가 없다”며 좋아 했다. 왜? 우린 생산 전문 회사니까. 그러나 ‘삼성’이나 ‘대우’는 종합무역상사로 급성장해 바이어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같은 생산전문회사를 상대하기보다 실무적으로 불편해 했다. 종합무역상사 담당자들의 경우 오늘은 대리였는데 다시 연락하면 과장이 되어 있고, 또 니트 부서에 있다가 간이복 부서로, 재킷 부서로 가 버리고, 미주 부서에 있다가 유럽 부서로 옮겨 앉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바이어는 자기 오더가 어디 가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경우엔 오더 진행이 안 되어 물어보면 담당자가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고 다른 부서로 가버린 황당한 경우도 발생하곤 했다.

= 國東에 합류한 시기, 당시 시장 상황은?
1982년도에 미국으로 건너 갔다가 1985년도에 귀국해 회사에 합류했다. 당시 국내엔 미싱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는 요즘처럼 컴플라이언스가 없어서인지 오버타임은 물론 밤을 새우는 일도 다반사였다. 일손이 모자라 무역부 직원도 덤벼들어 패킹을 해야만 했다.
쿼터는 소진해야 하는데 생산이 미처 따라주질 않다보니 별일도 다 많았다. 파자마라는 게 윗도리와 아랫도리가 세트여서 하나로 포장해야 하는데 수량 맞추느라 각각 포장을 하기도 했다.(물론 현장 작업자들의 꼼수였지만) 그런데도 클레임이 없었다. 물론 바이어도 모르고 팔았다. 고객이 바지가 없다고 얘기하면 윗도리만 팔았다. 그만큼 오더는 넘쳐나고 일손은 부족해 꼼수 해프닝도 종종 있던 시절이었다.

<기사의 전문은 월간 봉제기술 2017년 8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