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봉제인 | 김성규 | 솔로몬패션 대표

섬마을 소년, ‘솔로몬의 지혜’를 얻기까지
“이것 좀 보세요” 대뜸 기자에게 자신의 책상 위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이것은 모든 생산 관련 정보를 누구와도 실시간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신개념의 봉제공장 스마트화를 위한 프로그램이죠. 실시간으로 생산 공정이 파악되어 적재 적소에 최상의 공정을 계획할 수 있어요. 미리 납기일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파악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모든 생산장비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현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동영상, 사진, 음성, 이미지가 첨부된 문서로 직접 작업 지시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9월 중 현장 적용을 목표로 지금은 프로그램 개발회사와 적응 테스트 중입니다.”

스마트공장化의 첫단계로 생산정보의 네트워크화에 공을 들이고 있는 ‘솔로몬패션’ 김성규 대표. 그는 “봉제공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마트공장’이 답”이라며 “급변하는 봉제생산환경에 대응키 위해 자동화 생산 시스템 구축은 필연”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현장 작업자들에 대한 데이터가 전무했어요. 늘 해오던 방식대로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것만 있었지, 작업자 개개인의 객관적인 능력 범위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번 시스템 구축으로 기계가동시간은 얼마이고, 어느 품목을 얼마만큼했는가 등이 데이터화 되어 작업 지시에 도움이 클 것으로 기대합니다.

어떤 작업자가 어느 공정에 적합한지에 대한 것도 파악 가능하지요. 그렇게 되면 생산라인 전체에 공정 분배가 원활해져 생산성은 물론 인력 절감 효과도 클 것으로 기대합니다.” 솔로몬패션은 숙녀복 하의(바지)생산 전문 업체다. 패션의류기업 (주)한섬의 메인협력사로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역 인근, 한섬 팩토리아울렛 건물 4층에 공장을 두고 한섬의 숙녀복 브랜드 ‘SJSJ’를 생산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솔로몬패션을 비롯해 한섬의 주력 브랜드인 타임(TIME), 마인(MINE), 에스제이(SJSJ), 시스템(SYSTEM) 등을 생산하는 여러 협력사 공장들이 입주해 있다.

하키선수로 키운 투지, 봉제판에서 불사르다

•김성규 대표(줄무늬)의 하키 경기 모습.

“원래 한섬 오너가 패션 쪽 일을 해서 생산에 대한 배려가 깊고 협력 공장의 입장도 많이 헤아려 주는 분이죠. 생산을 하면서 그 분과 면담도 자주 했는데 애로사항을 많이 들어주는 편입니다. 한섬 오너는 아울렛몰 ‘마리오’가 이곳에 들어선 다음 해에 ‘나도 이런 걸 해야겠다’며 앞으로 생산이 어려워질 것이니 협력공장을 가까이에 두어 생산을 안정화시키는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당시 부평 쪽에 팩토리아울렛을 준비하려다가 서울에 있는 협력공장들이 부담스러워 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봉제공장을 처음 시작한 곳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이었다. 이후 인근 상도동으로 옮겼다가 2007년 10월에 한섬의 팩토리아울렛 빌딩에 제일 먼저 입주했다. 지금에 이르는동안 김성규 대표의 봉제 인생도 결코 평탄치만은 않았다. 1997년 5월, 달랑 재봉기 5대를 들여놓고 공장 간판을 내걸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조그만 섬마을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연결되어 뭍을 나오기가 수월하나 1970~1980년대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였다. 고교시절 하키선수였던 그는 1982년에 하키 특기로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었으나 집안 형편 상 대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전남권에서 광주일고와 조선대가 하키로 명성을 날리던 때다.

심란한 마음에 무작정 상경을 결심했다. 무슨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다. “누나 자취방에 머물며 낯선 서울거리를 배회하던 중 우연히 ‘라사라양재학원’을 찾게 되었어요. 옷 만드는 것을 배우는 곳이란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주인집 아주머니한테 ‘이런데가 있든디 어쩌요?’라고 물어봤죠. 그 분 말씀이 ‘내 동생이 옷 만들다가 군대갔는데 입대 전까지 월 100만원씩 벌었다’고 하더군요. 순간, 촌놈 깜짝 놀랐지요. 그때 100만원은 엄청 큰 돈이었거든요. 누나에게 말해 곧장 학원에 등록했죠. 팔자에 없던 옷 만드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6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첫 취업한 곳은 블라우스 생산공장이었다.

군대에서 옷수선하며 다양한 재봉기 사용법을 익히다.

동대문구 장안동에 소재한 수출봉제업체로 작업인원만 300명이 넘었다. 그는 재단반에 배속되었다. 다섯개 재단테이블을 오가며 왼종일 연단만 하다보니 너무나 힘이 들었다. 양재학원에서 배운 건 패턴인데 패턴을 실습해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3개월만에 뛰쳐나와 시장 제품을 하는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칼(재단)을 잡아 보기 위해서다. 사장에게 재단 일을 속성으로 배워 6개월 만에 정식 재단사가 되어 칼을 잡았다. “급히 먹은 밥이 체한다고 했던가요. 재단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원단 결을 맞춰 잘라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재단을 했습니다. 동료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결이 잘못되었으니 이제 너 큰 일 났다. 네가 받는 월급으로 턱도 없다’며 내게 잔뜩 겁을 주더군요. ‘일을 쳤구나’ 싶어 어린 마음에 수습하기 보다 일단 모면해야겠다 싶어 그 길로 공장을 나와 고향으로 튀었습니다. 도망을 간 거죠.”

시골로 내려온 그는 6개월 정도 농사를 거들다가 1984년 군에 입대했다. 수색대 내 정비실이란 곳이 있었다.기계 정비가 아닌 의류를 정비하는 곳이다. 제대를 앞둔 정비실 선임이 후임자를 물색을 하던 중 김성규 일병의 옷 관련 사회 이력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 끊어질 뻔 했던 옷과의 연은 그렇게 또다시 이어졌다. 선임으로부터 한달 가량 옷 수선을 배워 정비실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찢어진 것 꿰매다가 좀 익숙해지니까 선임하사가 ‘보온통 싸개를 만들어 오라’고 했어요. 원단과 석면, 비닐, 지퍼를 구입해 봉제했습니다. 수색대원들이 동계 훈련 나갈 때 그 보온통의 가치가 유감없이 발휘되었지요. 그런 식으로 조금씩 봉제가 익숙해지자 선임하사들이 옷을 만들어 달라며 원단을 구해 왔습니다. 군대이다보니 하라면 해야죠. 하여 얄팍하게 익힌 패턴기술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어렵다고 엄살 떨 것이 아니라 공장 스마트화에 관심을

군복은 이음부분이 투박하잖아요. 정비실에는 각종 재봉기가 골고루 갖춰져 있어 이음부분도 부드럽게 봉제할 수 있어 엄청 좋아했어요. 특히 고참들은 제대할 때 바지통을 넓혀 달라며 빵과 담배를 사다 안겨주어 재미가 쏠쏠했습니다.엄밀히 말해 그게 제 봉제의 시작이었어요. 이를테면 군대에서 재봉기 사용법을 마스터한 겁니다. 그런 다음 사회에 나오니 훨씬 자신감이 생기고 일이 수월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대후 봉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곧장 상경했다. 동대문시장제품을 생산하는 서울 광진구 구의동 소재, 의류공장에 취직했다. 무일푼이라 그곳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조건이었다. 아침에 원단을 끊어서 보내주면 그걸로 샘플을 만들고, 바로 확인한 다음 재단, 봉제, 완성해 다음날 물건을 시장에 내보내는 사이클이다.

그렇게 3개월 가까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적으로 숙녀복 바지와 재킷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회전이 빠른 시장 제품 만드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패션브랜드 회사 문을 두드렸다. “‘보라미패션’이라는 회사에 그레이딩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당시 꽤나 잘 나가던 브랜드였죠. 일반 점퍼였다면 별거 아니었을텐테 선이 오묘하게 끊어지는 특이한 디자인의 그레이딩을 해보라고 주더군요. 공식은 알겠는데 분배해서 하기가 어려웠어요. 아침에 면접 보러가서 오후 1시반까지 주어진 그레이딩을 하느라 쩔쩔맸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음날 연락이 왔어요. ‘그레이딩 실력은 부족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잡고 해놓는 걸 보고 불렀다’며 ‘열심히 일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레이딩과 맞춤패턴을 익힌 그는 보라미패션을 나와 이번엔 프로모션업체로 자리를 옮겼다. 1991년도 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 부부가 지방을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어느 정도 충격이 가시자, 회사가 존폐의 기로에 섰다. 얼떨결에 공장을 인수키로 결심했다.

동생이 결혼하려고 모아 놓은 돈까지 끌어들여 인수했지만 채 6개월도 못가 문을 닫고 말았다. 계획에 없던 공장 운영이라 불보듯 뻔한 결과였다. 그즈음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할 때라,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1992년 3월에 결혼을 했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안정적인 직장이 절실했다. 그해 강남구 신사동 영동호텔 인근에 있던 패션업체, ‘보끄레머천다이징’ 공장에 생산관리자로 입사했다. 입사 5년 차 되던 어느날, 오너로부터 ‘곧 어려운 경제상황이 닥칠 것이다. 대비책으로 인원 감축을 하게 될 것’이란 통보가 날아들었다. “얼떨결에 잠깐 운영하다가 실패했지만 나도 언젠가는 제대로 한번 공장을 운영해 봐야겠다는 꿈을 키워 나갈 때였죠. 이때다 싶어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윗선에다 보고했습니다. ‘회사를 나가 공장을 만들어 보끄레머천다이징의 숙녀복 하의를 100% 전담해 생산하겠다’고 말이죠. 다행히 회사에 밉보이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옛날에는 생산관리하고 다니면 대개 딴 주머니 차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생산관리자를 색안경 끼고 봤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오해를 받아, 한번은 내 통장과 신상을 다 털어 오픈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의 이런 면이 신뢰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때마침 인원감축을 계획하던 회사 측과 저의 생각이 잘 맞아 떨어진 거죠. 이리저리 자금을 끌어모아 3,300만원을 만들어 독립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재봉기 5대로 공장을 시작을 한게 1997년 5월의 일이다. 그가 낸 사업계획서를 본 보끄레머친다이징의 생산부장은 ‘솔로몬의 지혜를 얻길 바란다’고 덕담했다. ‘솔로몬패션’이라 社名은 그렇게 탄생했다. “어느날 보끄레 측으로부터 ‘기획상품’이란 이름으로 작업 오더가 들어 왔어요. 보통 생산 기일을 아무리 짧게 잡아도 보름 내지 20일 정도는 줍니다. 공정이 조금 난해하면 25일까지도 주는데, 이번엔 딱 일주일만에 마무리해 납품하라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아울렛이란 개념이 없을 때라 여기저기 물어봐도 방법이 없었어요. 공장이 놀고 있지 않는 이상 그리 급박하게 재단해서 봉제해 완성품이 나오는 시스템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제 의지를 테스트 하기 위한 것 같아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던 거죠. 결국 직접 재단을 해서 외주공장으로 보내 봉제해 다시 완성공장으로 옮겨 작업하는 걸로 계획을 짰습니다. 아울렛용으로 생산하니까 단가도 낮아 서울에서는 공장을 구할 수 없어 인천에 있는 외주공장까지 실어 날랐습니다. 인천에 있는 외주공장에서도 단가가 싸다고 난리여서 일단 재단비라도 줄여 주기 위해 직접 재단해서 외주공장으로 넘겼습니다. 그렇게하여, 요구한 제 날짜에 깔끔하게 납품을 한 겁니다. 이를 지켜 본 보끄레머천다이징의 상무가 저의 공장운영 능력을 인정했던 모양입니다. 이후 부터는 정상적으로 오더를 해 계획 생산을 할 수 있었고 6개월만에, 공장 오픈하면서 대출한 자금을 거의 다 갚을 수 있을만큼 공장 가동이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무렵, 또한번의 시련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IMF가 솔로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제 겨우 대출금도 거의 다 갚고 본격 가속페달을 밟으려는데, 불청객 IMF는 모든 계획을 뒤집어 놓았다. 보끄레 일감은 절반으로 줄었다. 보끄레 것만으로는 공장을 돌릴 수가 없어 여기저기 발품을 팔며 일감 확보에 골몰했다. 전직원이 똘똘 뭉쳐 다행이도 IMF를 슬기롭게 넘겼다. 그때 함께 숨죽여가며 고생했던 직원들 몇몇은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이후에도 ‘한섬’의 숙녀복 바지 오더가 이어지면서 2007년 10월, 한섬의 팩토리아울렛 빌딩으로 공장을 옮겨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올해 들어 한섬의 생산관리자가 바뀌면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지난해까지 한섬의 에스제이 하의는 100% 솔로몬패션에서 소화했다. “작년까지는 아웃터도 일부도 생산했으나 올해부터 바지 전문공장이란 이유로 아웃터는 오더하지 않아요. 일감이 다소 비어 ‘클럽모나코’ ‘제일모직’ 것도 조금씩 꿰맵니다. 물론 한섬 측에선 타 일감을 들이는 게 반가울 리 없죠. 예전엔 아예 못하게 했어요. 지금은 그래도 간섭을 덜하는 편인데 일감이 부족한 탓에 서로 이해를 하는 편이지요.”

다음은 김성규 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

– 생산설비 도입에 따른 생각
꼭 필요한 생산설비는 가격부담이 되더라도 들여 놓는 편이다. 최근 자동 재단장비(CAM) 도입을 위해 여러 브랜드를 놓고 고민 중이다. 앞으로 젊은 인력 유입은 없이 숙련 인력은 고령화로 치닫고 있어 머지않아 생산성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생산장비의 힘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마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 독자브랜드 & 공동브랜드
디자인을 하고, 패턴을 하다보면 독자 브랜드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 저 역시 골프웨어 프로모션을 했던 건 결국 내 브랜드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였다. 서울의류협회 회원사 봉제인 11명이 모여서 만든 공동브랜드 ‘소우앤지(S.E.W&G)’가 있다. 런칭한지 올해로 3년째다. 독자브랜드는 잠시 미뤄놓고 공동브랜드 ‘S.E.W&G’를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다.

– 서울대 패션산업 최고경영자과정 이수
공장 쪽으로만 계속 달려오다보니까 테두리 안에 갖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가 있을 거란 생각에 알아보다가 같은 생각을 가진 업계 대표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과정이 있어 노크하게 됐다. 1년 과정으로 국내외 패션봉제시장 흐름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한 후 분과별로 팀을 만들어 ‘한국 봉제산업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에 관한 제언’이란 제목의 논문도 발표하는 등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패션산업 최고경영자 과정을 통해 각 기업 현장 방문도 해봤는데 가는 곳마다 색깔이 다 달랐다. 혼자 울타리 쳐놓고 일 하다간 중요한 걸 다 놓치게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 객공시스템 & 외국인 인력에 대해
객공시스템은 이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능력에 의지해 쉽게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월급 직원과 밸런스가 맞지 않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객공시스템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인 근로자도 역시 쓰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산업연수생은 공장 시작할 때인 1997년도에 3명을 신청해 고용한 적 있다. 숙식을 모두 제공해 주다보니 이들에게 지불되는 제비용이 우리의 경력자급여보다 많아져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어 이후부터는 고용을 포기했다.

– 스마트공장 구축에 대한 견해
현재 우리 공장 인원들의 평균 연령대는 50대 중반이다. 앞으로가 염려스럽다. 스마트공장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스마트공장을 시작하려면 일단 공장 내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생산시설도 그에 맞게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갖춰야 하고 거기에 걸맞는 젊은 인력들이 유입되어야 한다.

– 현장 관리자에게 책임감 부여
현장 작업에 대한 권한은 현장관리자에게 일임한다. 구인에 대한 권한도 마찬가지다. 면접도 관리자가 직접 보게 하고 있다. 오너가 면접을 보고서 현장에 투입하기 보다는, 현장에서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이기에 현장관리자에게 맡기는게 경험상 훨씬 낫다.

[인터뷰 : 차세호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