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호 | 대성가먼트 대표

불굴의 기세로 버틴 미얀마 30년
1990년 미얀마에 처음 진출한 세계물산 주재원 생활을 시작으로 거의 30여 년을 미얀마에 거주하고 있는 성재호 대성가먼트 대표는 국내 봉제업의 현지 진출 역사와 함께 한 인물이다. 현지에서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으나 잘 극복하고 지금은 2개 공장, 15개 라인에 직원 1800명의 내수 아웃도어 다운 제품 전문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성재호 대표를 만나 본다. <편집자주>

미얀마에 처음 봉제로 진출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언제 여기에 왔고 진출 초기 어려움은 없었나요?
지금은 상호가 바뀌었지만 1990년 당시 세계물산이 처음으로 미얀마에 봉제공장을 설립했습니다. 저는 세계물산의 주재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진출 초기여서 교민사회도 형성되지 않았고 변변한 네트웍도 없었을 때입니다. 현지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무조건 부딪히면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얀마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원활한 의사전달이 안 돼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언어문제도 힘들었지만 초창기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음식이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주재원 생활을 해보았지만 미얀마 음식은 잘 맞지 않았습니다. 건강에 문제를 겪을 정도였으니까요.

미얀마가 첫 해외생활을 했던 나라가 아니었나요?
미얀마 오기 전에 중국, 사이판, 방글라데시 등지에서도 생활을 했습니다. 주로 해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봉제업체를 직접 운영해본 경력이 있습니다. 그 경력으로 해외에서 봉제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현재 이곳에서 공장을 다시 설립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습니다.

마침 방문 당일이 월급을 지급하는 날이었다.

주재원 생활을 하다가 독립하게 된 과정은 어떠했나요?
세계물산 주재원 생활을 하다가 공장이 철수하면서 이곳에 진출한 독일계 공장에 취업해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가 공장을 설립했던 때가 2003년 무렵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얀마의 미주오더는 2003년 미얀마 민주화법 제정으로 말미암아 경제제재가 본격화되면서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미주 오더가 끊기면서 내수나 일본, 유럽 등지의 바이어를 물색해 버텨왔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오더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갑작스런 오더 부족도 힘들었지만 기초 인프라 부족과 자연재해에 따른 피해도 컸다고 들었는데 어땠는지요?
도로, 통신, 전력 등 기초 인프라는 과거에 비해 개선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이 불편한 편입니다. 특히 물류 운송은 경쟁국에 비해 여전히 취약요소이며 전력 사정 또한 열악하기는 과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자연재해도도 잦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피해가 태풍 나르기수가 이곳을 덮쳤을 때입니다. 2008년 6월 무렵이었는데 수천 명의 사망자를 냈던 초대형 태풍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들이 침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희 공장 역시 침수 피해를 입어 가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한 달 간의 공장 복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문제는 복구 기간 동안 조업을 전혀 할 수 없었지만 직원들의 급료는 지급해야 했습니다. 직원들도 그 달 벌어 그 달 쓰는 생활을 하는 형편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제 사정만 내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 때는 인원이 적었기에 망정이지 지금처럼 1800명 정도였으면 아마 회사가 휘청했을 것입니다.

제2공장 외경. 최신 컴퓨터 재봉기 라인을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다.

오더 부족에 자연재해까지 이곳 진출업체들이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미얀마 진출업체들은 이런 고생을 함께 겪어서인지 다른 해외 지역의 한인봉제업계와는 달리 단합이 무척 잘되는 편입니다. 다른 지역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로 경쟁관계로 치열하게 견제하고 얼굴 붉히는 일도 많다는데 이곳은 서로 도와주면서 협력해 나가는 분위기입니다. 한인봉제협회를 중심으로 네트웍도 잘 형성되어 있고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주면서 함께 성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미얀마 직원들의 업무 적응력이나 인력의 질적인 측면은 어떻다고 생각하는지요?
국토가 남북으로 2천 킬로에 달하고 다양한 민족이 있는 나라이다 보니 다소 복잡한 것도 사실입니다. 열대 기후에 사는 민족의 특성상 느긋한 성향도 보이지만 태생적으로 온순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는 화를 내거나 급하게 다그치는 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천천히 일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면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숙련된 작업자가 공정을 소화하는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 보여주고 스스로 개선점을 찾으라고 맡겨주면 이후 생산성도 곧잘 끌어올립니다. 우리 회사가 자주 이용하는 방법이지요. 안된다고 윽박지르기 보다는 순리대로 깨달으면서 일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 회사에는 설립 때부터 함께 일해 온 직원들이 많습니다. 제가 이역만리에서 공장을 세우고 잘 운영해 가고 있는 것은 여기 이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일해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성대표께서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사건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미얀마 교민사회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어 극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14년 길을 가다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고 사경을 헤매던 차에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미얀마에서 외국인은 지정된 병원에서만 치료해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정된 병원의 시설은 열악했고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도저히 믿고 맡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제 가족들과 한인봉제협회 관계자들은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했습니다. 좀 더 시설이 좋은 곳으로 빨리 옮기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 파악하고 태국의 병원으로 옮기기로 한 것입니다. 급히 프로펠러 비행기를 구해 이송했고 다행히 그곳에서 대수술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약 반년간의 병원치료를 받아야했고 이후에도 오랜 재활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재활과정을 거쳤지만 아직까지 사고 이전의 몸으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후유증이 많이 남았고 지금도 재활치료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공장은 제 가족이 돌보았고 다행히 제가 다시 돌아와 지금 이렇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봉제협회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뺑소니 운전자는 잡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주로 어떤 오더를 하고 있는지요?
한국 내수 아웃도어 다운 의류를 전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주 오더가 끝나고 2005년부터 일본 오더가 서서히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한국 내수와 일본 오더를 함께 했습니다. 지금은 한국 내수 오더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네파, 라푸마 등 국내 6대 아웃도어 브랜드를 물량을 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웃도어 다운 제품의 오더가 줄어 거래 브랜드가 더 늘어났습니다. 지난해까지는 6대 브랜드 제품만 했는데 각 사들이 일률적으로 물량을 줄여 올해는 1개 브랜드를 더 추가했습니다. 예전부터 거래 요청이 있었던 브랜드였는데 캐파가 없어 못하다가 올해부터 새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내수 아웃도어 경기가 좋지 못하다는 반증이지요.

미얀마로 내수 아웃도어 물량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데 어떤지요?
올해 거래를 시작하는 브랜드 역시 베트남 하노이 지역에서 생산하다가 그곳의 임금이 오르면서 생산 코스트가 높아져 미얀마로 발길을 돌린 경우입니다. 내수 프로모션 업체들의 베트남 생산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이유는 현지 임금 인상 여파로 계속 올라가는 생산단가와 수출공장들이 국내 내수 오더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물량이 미얀마로 몰리면서 현지 진출 업체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고 베트남에 갔던 업체들도 시장 조사차 이곳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내수 공장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경기 침체로 내수 물량이 줄고 있고 있는데 대책은 있나요?
앞으로 내수 오더만 하기에는 한계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수 외에 미주와 유럽 수출 오더를 확보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국 바이어의 공장 오딧을 받았고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향후 미주 수출을 위해서도 유럽 바이어의 오딧을 통과해야 유리합니다. 유럽오더는 내수에 비해 가공임은 낮은 편입니다. 그러나 비수기를 대처하고 적정 가동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더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주는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관세혜택을 받기 힘들어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수출이 거의 힘든 상황입니다.

생각하고 있는 미래의 청사진이 있다면?
오랜 기간 미얀마에서 생활해 왔고 현지인들과 함께 난관을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곳 현지인들이 이 회사를 잘 승계 받아 계속 존속시켜 나갈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충실히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 직원들을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대해왔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해 왔는데 앞으로도 변함없이 함께 해 나갈 것입니다.

취재: 李相澈 局長